사악한 책, 모비 딕

2017.08.20 12:05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켈리가 함께 쓴 모든 것은 빛난다(김동규 옮김, 사월의책, 2013)는 서양 고전이라는 오래된 거울에 우리 시대의 삶을 비추어 성찰하는 아름다운 에세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몇 권의 고전 가운데 하나가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이다. ‘광신주의와 다신주의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그 독창적이고 정밀하고 유려한 글을 천천히 여러 번 읽었다. 읽을 때마다 감탄하며 생각했다. ‘이런 글을 읽고도 모비 딕을 읽지 않을 수 있을까?’ 평소 고전뿐만 아니라 고전에 관한 책들 또한 두루 찾아 읽는 이유가 여기 있다. 책이 책과 책을 잇는다.

 

너새니얼 필브릭의 사악한 책, 모비 딕은 그렇게 찾은 책이다. 몇 년 전 월급 받던 편집자 시절에 내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혼자 차린 출판사에서 두 번째 책으로 펴냈다. 이러니 책에도 인연이 있고 운명이 있다는 말을 되뇌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원제는 왜 모비 딕을 읽는가?(Why Read Moby-Dick?)’이다. 제목처럼 내용도 군더더기가 없는 책이다. 모비 딕을 읽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들만 알뜰히 담아냈다. 멜빌이 모비 딕을 쓰는 데 영감을 준 포경선 에식스호의 침몰 사건에 관한 책, 바다 한가운데서In the Heart of the Sea로 전미도서상을 받은 저자의 필력도 거침이 없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을 꼽자면 간결하면서도 드라마틱하게 그려진 허먼 멜빌의 기구한 삶과 그가 모비 딕을 써나간 과정이다. 특히 주홍 글씨의 작가 너새니얼 호손과 멜빌의 교류, 호손이 멜빌의 모비 딕창작에 끼친 특별한 영향, 멜빌이 호손에게 써 보낸 내밀한 편지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실 한국어판의 제목도 멜빌이 모비 딕을 탈고한 뒤 호손에게 쓴 유명한 편지의 한 문장(“저는 사악한 책을 썼지만, 새끼 양처럼 무구한 기분입니다”)에서 따 왔다. 멜빌의 삶에서 호손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저자는 두 사람이 나눈 우정의 이야기와 멜빌이 쓴 편지들만 보더라도 모비 딕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 짤막짤막하게 소개된 이야기만 읽어도 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20대와 30대에 각각 한 번씩 모비 딕읽기에 도전했다가 두 번 모두 중도 포기한 씁쓸한 경험이 있다. 악명 높은 난삽한 서사를 이겨내지 못했다. 무시무시한 고전(古典) 앞에서 고전(苦戰)을 면치 못했다고 할까. 그리고 40대에 들어선 올해, 이 책을 만들며 드디어 모비 딕을 독파했다. 더없이 광막한 바다의 이미지, 시적이고 황홀한 문장들, 절대 잊지 못할 몇몇 등장인물이 여전히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책의 저자 너새니얼 필브릭은 지금까지 모비 딕을 열 번 이상 읽었다고 한다. 그 남다른 독서의 경험과 그로부터 얻은 통찰을 최대한 압축하여 써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관심 있는 독자들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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